아름다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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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생

21 허름한허세 0 208 0 0
(2022년 5월 19일)


아름다운 생


갓 짜낸 소젖이 화로에서 끊는 시간, 나는 보았지, 고기를 잡는 어부와 소 떼 몰고 가는 맨발의 아이들, 소 열 마리 염소 서른 마리 받고 신부로 팔려왔다네, 통나무에 기대앉아 웃는 아낙들, 웃음은 여인들의 비밀 결사 동맹, 어느 배에서 나왔는지 따지지 않는다. 땅바닥에서 노는 저 아이들은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다. 나는 들었지, 가시나무 울타리 위에서 나부끼는 붉고 푸른 천 조각 살랑대는 소리, 수만 수억 금실 같은 햇살 아래 실 잣고 천을 짜고 옷을 만드는 아가씨들, 아가씨들에게 윙크하는 젊은이들 휘파람 소리, 풀과 나무와 새와 풀벌레의 노래.

오래전 나이자 미래의 친구들
한 뿌리에서 올라온 잎과 꽃이 아니라면
어찌 내가 그들을 경험할 것인가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사랑했지. 나처럼 생긴 이 세상의 모든 여자와 남자, 농부와 어부와 장사꾼, 소쿠리에 담긴 진흙을 이고 먼 길 걸어와 집이자 성전을 바르는 흙손을, 벽에 닭과 새와 소와 무지개를 그리는 색색 그림, 아름다웠지, 작업을 마치고 모락모락 김 나는 뜨거운 밥 앞의 따스한 입들과 흰 스카프를 쓴 여인들의 입김과 둥그런 모닥불, 꿈에 부풀었지. 교회당에서 영원을 서약하는 웨딩드레스와 법원 앞에서 이별의 악수를 하는 연인들, 축복 있으라, 한때 사랑했으며 이젠 사랑할 일만 남았으니.

발 없는 발
종일 산 위를 굴러가던 해가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무엇을 하기에 너무 늦지 않은 시간
지난 게으름도 늦은 시작도 용서받을 수 있는 시간

창공에 구명 하나 뚫렸다 머잖아 내일이
나를 또 낳을 것이다

* 김해자, [해자네 점집]에서
- 걷는사람 시인선 1, 2018. 4.25



:
가만히 읊조리면
아름다운 시,

축복 있으라,
한때 사랑했으며

이젠 사랑할 일만 남
시간

( 220519 들풀처럼 )


#오늘의_시

- 사진 : 0518 텃밭에서 바라 본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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