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뜨거운 시

홈 > 소통 게시판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이 뜨거운 시

21 허름한허세 0 368 0 0
(2022년 11월 17일)


이 뜨거운 시


뜨겁게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서
달걀의 흰자위와 노란자위가 익어가고 있다는 것이 시가 될까
펄펄 끓는 프라이팬에 달걀을 깼을 때
갑자기 털이 몇가닥 붙은 병아리 한 마리가
지글거리는 프라이팬을 밟으며 앗 뜨거 앗 뜨거
가녀린 발을 하나씩 번갈아 밟으며 뛰쳐나왔다고 해야
시가 되겠지
많이 무서웠지?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 시

그 뜨거운 무쇠 프라이팬에서 두 발을 번갈아 밟으며 간신히 도망쳐 나온
눈도 못 뜬 노란 병아리
양수가 찢어진 듯 눈과 얼굴에 줄줄 흘러내리는 흰자위 같은
반투명한 양막을 뒤집어쓰고
앗 뜨거 앗 뜨거
인생을 알기 전에 화상부터 입었네
온통 불붙은 세계의 스크린이 얼떨떨한 그런 시

양막은 포유류의 태아를 싼 반투명의 얇은 막
그런 병아리가 포유류야? 포유류였어? 닭이 젖을 먹였어?
뜨거운 프라이팬 위에서 병아리가 젖을 먹었나? 닭이 젖꼭지를 물렸나?
그림은 자비롭지만
닭이 포유류가 아니니까 시가 되지
시는 그런 거지
그런 시

이 액체의 정체성
금방이라도 머리카락 줄줄 흐르는 물에서
소복 입고 머리 푼 여인이 나올 것만 같은 그런 시
지글거리는 프라이팬에 물이 뚝뚝 떨어지고
하얀 수증기로 살이 익어가는 고통
시인이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웃고 있어
맥락이 끊어진 뼈의 고통
전신화상으로 수포가 벌떼처럼 일어나
두개골 속에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나네
그렇게 돌발적인 것이 있어
그저 어안이 벙벙한 우연
돌발성의 황홀이라는 것
거대한 윤회의 바퀴가 돌아가다 끊어져 전복되고 굴러가니
그런 것이 시인
그런 시

* 김승희, [창작과 비평 가을 2022]에서 (137~9)
- 창비, 통권 197호, 2022. 9. 1



:
오늘 두 해만에
두 내시경을 받고

아직은 무탈함을 확인 받았으니
남은 날도

이 뜨거운 시처럼
시인처럼 살아보자,

프라이팬에서
발을 종종 거리며 화상 입을지라도.

( 221117 들풀처럼 )


#오늘의_시

- 사진 : 신성산 능선에서 바라본 밀양 들판과, ㄱ ㅂ ㄱ

0 Comments
카테고리
통계
  • 현재 접속자 1,073 명
  • 오늘 방문자 4,935 명
  • 어제 방문자 7,737 명
  • 최대 방문자 14,757 명
  • 전체 방문자 2,175,396 명
  • 전체 게시물 46,473 개
  • 전체 댓글수 5,249 개
  • 전체 회원수 1,245 명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