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호감대선의 뿌리
해방 후 친일 청산에 실패한 것은 현재까지 우리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현재적 문제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국민 대다수는 1948년 반민특위의 좌절을 그 이유로 든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법률 제3호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키고 10월 22일 반민특위를 출범시켰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친일 세력들의 집요한 방해 공작으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반민특위 출범 당시 이미 이 특위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처벌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울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군정 3년을 거치면서 나라 권력의 대부분이 친일파들의 손아귀에 다시 들어갔기 때문이다. 반민특위는 어떻게 보면 미군정 3년 동안 좌절을 겪고 탄압받았던 민족세력이 친일파들을 처벌하겠다고 나섰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방 직후의 정치 지형은 대일 항전에 투신했던 좌우파 정치 세력과 친일 반민족 집단의 둘로 나눌 수 있다. 대일 항전에 나섰던 정치 세력은 민족주의 정치 세력과 사회주의 정치 세력이다. 민족주의 정치 세력의 본류는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다.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이 이끄는 중도 좌파 정당인 조선인민당이 있었다.
다른 한 세력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부역했던 친일 집단들이었다. 우남 이승만이 이끄는 독립촉성중앙회와 인촌 김성수가 이끄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그들이었다. 이 두 세력에는 일부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 대체적인 성격은 친일 지주 정치 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해방된 조국의 정권을 잡겠다고 나설 수 없으니 처음에는 임시정부를 추대하겠다는 ‘임정봉대론’을 들고 나왔다.
미군정 3년 동안 실정의 연속이었던 것은 이들 반민족 친일 세력들이 미 군정청의 여당으로서 행정부는 물론 검찰·경찰 등의 사법기관들도 장악하고 일제 때처럼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이런 왜곡된 정치 구조에 대한 심판이 1948년 5·10 제헌의원 선거였다. 백범 김구의 한국독립당이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해 참여를 거부한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였지만 그 결과는 이변이었다.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235명이 입후보했는데, 24%의 득표율로 55석을 얻는 데 그쳤다. 91명이 입후보한 한민당은 17%의 득표율로 29석 확보에 그쳤다. 가장 많은 의석을 획득한 것은 42%의 득표율로 85명이 당선된 무소속이었다. 무소속에는 한독당 탈당파와 독립운동 세력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한독당이 제헌의원 선거에 참여했으면 아무리 친일 세력들의 방해 공작이 치열했어도 제1당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독당 선거 불참에 대해 김구 주석의 실책론이 지금껏 대두되지만 백범은 자신의 말처럼 통일의 제단에 자신을 제물로 내놓은 것이었다.
둘이 합쳐 41%밖에 얻지 못한 독립촉성국민회와 한민당이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독차지한 것이 현재까지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왜곡된 정치 구조의 뿌리다. 그간 군부 세력들의 쿠데타가 반복되면서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형성되었고, 그 극복 과정에서 김영삼·김대중이라는 걸출한 민주화 지도자가 나타나 1987년의 헌법 개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여전히 정치 문제에 관한 한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근본 원인의 뿌리는 바로 두 친일 세력이 야와 야를 독점한 1948년 체제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동안 몇 번 강조했지만 조선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는 식민사학자들이 이른바 ‘촛불 정권’에서 더욱 승승장구하는 이 광란의 뿌리도 바로 이 1948년 체제가 약간의 화장만 바꾼 채 지금껏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 있다. 급기야 어느 정당의 정강 정책이 아니라 상대 후보와 가족에 대한 호불호로 대통령이 결정될 지경까지 이른 것 역시 현재의 여야 모두 1948년 체제의 수혜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구조를 타파하고 한국 정치를 정상화하는 길은 35년 세월을 풍찬노숙하던 독립운동가의 역사관으로 우리 사회를 다시 세우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