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과 정치
1997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TV 예능에 출연했다. 노타이 차림으로 나와 “나는 알부남(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이 아니고 본부남(본래 부드러운 남자)”이라 했다. 부인 이희호 여사가 전화로 연결되자 “당신, 사랑해요”라고도 했다. 사별한 첫 부인 차용애 여사를 언급할 땐 “고생만 시켜 굉장히 가슴 아프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예능 출연 효과는 컸다. 단숨에 지지율이 3~4%p 올랐다. 정치인 예능 출연이 그때 본격화됐다고 한다.
▶안철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겐 정치 등용문이 예능이었다. 2009년 ‘무릎팍도사’ 출연을 계기로 벤처 기업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이던 2003년 ‘느낌표’에 출연해 청소년이 읽을 책을 권했다. 재직 중 예능에 나온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는 ‘힐링캠프’에서도 맞붙었다.
▶정치인들은 예능 출연의 효과로 인지도 확산과 이미지 제고를 꼽는다. 이재명 전 경기지사가 성남시장이던 2017년 ‘동상이몽’에 고정 멤버로 11회나 출연하자 특혜 시비가 일었다. 이낙연·박원순·오세훈·원희룡·홍준표·나경원·박영선 등 정치인들도 예능 출연 경력을 갖고 있다. 각종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지난 대선에선 후보들이 유튜브 예능에서 개인기 대결을 펼쳤다. 시청률 오른다고 방송들도 정치 예능을 좋아한다.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출연한 예능은 동 시간대 1위를 찍었다.
▶윤석열 당선인이 20일 역대 당선인 신분으론 처음으로 예능에 출연했다. “숙면이 안 된다”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고 토로했다. 시청률은 높지 않았다고 한다. 후보 시절 예능에 나왔을 때는 ‘계란말이’ 특기가 히트를 쳤지만 이번엔 그런 대박 상품은 없었다는 평가다.
▶윤 당선인 예능 방송이 나가자 돌연 문재인 청와대가 “지난해 문 대통령의 예능 출연을 해당 방송에 문의했다가 거절당했다. 제작진 의사를 존중해 더 이상 요청하지 않았다”고 끼어들었다. 자신들도 예능에 나가고 싶었지만 밀어붙이진 않았다는 것이다. 문 정권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5년 내내 방송을 정권 응원단으로 만들었다. 그 방송을 통해 국정을 TV 쇼로 만들었다. ‘대통령과 국민 간 대화’는 각본에 따른 예능이나 다를 게 없었다. 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탄소 중립을 선언할 때는 공영방송에 컬러 화면 아닌 흑백 화면을 내보내게 했다. 예능 좋아하던 문 대통령이 임기 말에 다른 사람의 예능을 보고 심사가 편치 않았던 것일까. - 김태훈